본당안내-주보성인


 성 정하상 바오로(1795~1839)


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(丁若鐘)의 둘째 아들로,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(上宰相書)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.

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(앵베르) 주교에 의해 이신규(李身逵)와 함께 신학생으로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말미암아 신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.
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(丁哲祥, 가롤로)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 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. 몸 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제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(丁若鏞)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.

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(趙曾伊) 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고 그 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(茂山)에 유배중인 조동섬(趙東暹,유스티노)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, 성직자 영입 운동 을 전개하였다.

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조신철(趙信喆), 유진길(劉進吉)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(모방)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 을 영입하는데 성공하였다.

1839년 7월 모친 유소사 (劉召史), 동생 정정혜 (丁情惠)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 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.
정하상은 포청에서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 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. 9월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.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.

현재 정하상 성인의 묘역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성업을 이루신 이벽, 권철신, 권일신, 이승훈,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와 함께 한국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에 조성되어 있다.